2007년 1월 18일 목요일

석궁사건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성균관대에서 재직했던 옛 수학교수의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하다. 물리력을 사용하여 어느 한 인간에게 위해를 입힌 것은 그 대상이 누구였든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온 보편적인 규칙에 반하는 일이며, 이 일로 분명히 사회로부터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법과 질서는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가 투영된 현상이라는 논지를 펴는데는 그 교수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이번 일로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했든 누군가는 계속 이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몇몇 기사에서 김교수는 95년의 본고사 시험문제가 수학적으로 부적절한 문제였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에 해직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오마이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해임 사유는 해교행위와 논문부적격이었다.) 또 다른 기사들에서는 그가 평소 교수들과 반목하였고,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학생들의 시험 거부도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관련 교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교원은 품위유지의 의무를 갖고 있어야 했기에 그의 해임 사유가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에 있어 나처럼 자격을 갖추지 못한 한 개인의 판단은 의미가 없으므로 판결 자체에 대해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이 사건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집단의 힘으로 한 개인을 사장시키는 일이다. 김명호 교수는 학교의 동료 교수들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었다고 본인도 밝혔고 주변의 인물들도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그 교수의 재능과 학문적 능력이 묻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수학계에는 유난히도 천재들도 많았고, 괴짜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 시간에도 또 다른 천재들이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 둔 피상적인 "큰바위 얼굴"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라져 가고 있지는 않을까.

과거 허재는 그의 탁월한 농구실력에도 불구하고 괴팍한 성격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고, 백지영은 자신을 속인 매니저 때문에 몇 년을 쉰 뒤에야 이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최근의 오지호는 또 어떻고, 전인권은 어땠는가. 한 개인의 사생활이 그들에게 "공인"이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우리의 집단적 관음증은 합리화되어 왔고, 대중 속에 숨어 너무 쉽게 비난하고 돌을 던져 왔다. 그들은 정치인들처럼 부적절한 사생활이 공개되거나 그로 인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능을 펼쳐 보이는 것만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수학자가 그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그가 우리 사회의 학문적 자산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도록 배려했어야 했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를 기억하는 분들은 그 영화에서 존 내쉬가 마지막에 많은 동료 교수들로부터 존경의 표시로 만년필을 선물받는 장면에서 감동을 느꼈으리라. 우리 사회였다면 존 내쉬는 미친 놈이었고, 일찌감치 학교에서 내쫓겼을 테고 한 술 더 뜨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능력만으로 판단해줄 수 있었던 주변 인물들이 매우 존경스럽다.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학자로서의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천재들은 흔히들 괴팍하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인품까지 뛰어나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사람들을 포용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우린 어떻게 해야할 지 아뜩해지는 날이다.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는 능력과 함께 다른 모든 사회적 품성을 갖추기를 요구하고 있다. 정작 본인들은 그렇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완벽하게 "갖춘" 인물로 보였으나 결국 사기꾼이었던 황우석 박사의 얼굴과 학자로서의 양심을 지켰지만 철창 사이로 찍힌 사진 속의 김명호 교수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묻고 싶다. 과연 김명호 교수를 해직한 다른 동료 교수들은 얼마나 학문적으로 우월했는가. 처세에 능한 사람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아니라고 믿는다.

0 개의 댓글: